이 글은 YPC(옐로우 펜클럽)의 '글쓰기 워크숍-서브컬처 글쓰기'를 수강하고 작성한 애니메이션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에 대한 작품 감상문이다.
간략한 영화 소개
구름 저편 약속의 장소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장편데뷔작으로 2004년 11월 개봉하였다. 데뷔작답게 감독의 필모 전반에서 반복되는 테마나 연출방법의 기원을 찾는 재미가 솔솔 하다.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에조(훗카이도에 세워진 독립국가 이름)의 수수께기 탑에 날아가기 위해 비행기를 만들던 두 중학생 히로키와 타쿠야가 있었다. 탑은 아주 얇고 성층권 정도까지 곧게 뻗어있어 아오모리 어디서나 올려다 보였고 날씨가 맑으면 도쿄에서 보일 정도였다. 어느 날 소년들의 작업장으로 삼각관계의 여학생 사유리가 놀러 오고, 히로키는 그녀를 탑에 데려다주겠다 약속한다. 그러나 사유리는 돌연 사라지고 비행기 제작도 중지된 채 3년이 흘러버린다. 그 동안 타쿠야는 탑을 연구해 사유리의 실종이 탑과 관련 있음을 알게 되고 탑의 폭파와 독립이 목표인 테러조직에 가담해 탑과 사유리의 관계를 끊어내려 한다. 한편 도쿄에 있던 히로키는 운명적인 꿈 속에서 사유리와 재회한 뒤 곧장 아오모리로 돌아온다. 다시 만나 합심한 두 남자는 비행기를 완성하고 사유리를 태워 비행기를 날린다. 무사히 탑에 도착하자, 탑으로부터 평행세계를 주입받아 3년 동안 꿈만 꾸던 사유리가 깨어난다. 사유리가 의식을 차리며 무의식에 있던 평행세계가 쏟아지고 세상이 치환되기 시작한다. 바로 그 때, 히로키가 테러조직의 미사일로 탑을 부수면서 영화가 끝이 난다.

비평문을 쓰게 된 계기
대학교 애니메이션 동아리 활동을 잠깐 할 때, 이 작품의 감상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해결되지 않은 채 넘어갔던 논쟁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이 작품의 주인공, 히로키는 성장하는가?’였다. 당시 나는 ‘그렇다'의 입장이었으나 왜 그런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그렇다'의 입장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걸 보면 당시 반대 입장의 회원들도 나를 제대로 납득시키지 못했던 모양이다. 반대 입장이었던 사람들의 근거가 정확히 생각나지는 않지만 다음과 같았던 거 같다.
우선, 히로키의 회상 시점으로 영화 전반의 내레이션이 이뤄지기 때문에 히로키가 주인공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고 변한다.’는 성장물의 일반적인 공식에 비춰볼 때 확실히 이 작품에는 극복할 만한 고난도, 그를 통한 깨달음과 변화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비행기제작은 매우 순탄했고 비행 또한 단번에 성공해버렸기에 고난이라 한다면, 오직 히로키를 실의에 빠뜨렸던 사유리의 실종뿐이다. 그런데 이 실종을 극복하기 위해 히로키와 타쿠야가 무엇을 했는지는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 정부기관이 납치한 사유리를 되찾는 건 순전히 우연 혹은 운명으로만 묘사될 뿐이다. 게다가 탑에 도착한 이후 돌아오는 비행기 장면에서 영화가 끝나버리기에 목표가 이뤄진 후 인물들의 심리나 행동에 어떠한 변화가 생겼는지 관객들이 알기 어렵다. 이렇듯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도, 성장의 결과도 명확하지 않기에 주인공 히로키는 전혀 성장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타쿠야가 비행을 준비하려 사유리를 빼돌리는 장면과 몽타쥬되는 컷에서 오카베라는 인물은 타쿠야 직장 상사인 토미사와에게 이런 말을 한다.
게다가 (비행에서)돌아올 무렵엔 녀석들도 어린애가 아닐 거라고
오카베와 토미사와의 학창시절 회상이 술을 기울이는 장면과 대비되며 나오기에 맥락상 아이로 떠나서 어른으로 돌아올 거라는 말처럼 들린다. 오카베는 왜 저런 말을 한 걸까? 어쩌면 오카베가 히로키의 성장을 설명하는 돌파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장, 오카베의 경우
오카베는 이야기를 촘촘하게 만드는 조연이기도 하지만, 히로키와 비교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오카베는 히로키가 아르바이트하는 공장의 주인이자 타쿠야가 속한 테러조직의 수장으로 타쿠야가 연구하는 연구소의 상급자 토미사와와는 학창 시절부터 친구이다. 꽤 사이가 돈독한 편이라 서로 정보도 공유하고 도움을 주고받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오카베의 대사가 나올 때 화면은 토미사와의 책상 위 사진으로 클로즈업된다. 그 속에는 학창 시절의 오카베, 토미사와가 여학생과 비행기를 사이에 두고 서 있다. 이어서 토미사와의 회상으로 비행기가 날아가고, 여학생이 들판을 달리는 장면이 나온다. 사진 속 여학생 뿐만 아니라 남북 분단으로 생이별한 오카베의 부인도 언급만 될 뿐 등장하지 않는데, 여기서 나는 한 가지 가설을 생각했다. 남북분단이 발생한 시점이 23년 전, 즉 오카베의 학창시절이라는 점에서 오카베의 부인은 사진 속 여학생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만약 그렇다면, 오카베는 비행도 성공시켰고, 첫사랑과도 맺어졌다.
다시 오카베의 대사로 돌아가 보자. 오카베가 히로키네의 비행을 두고 그들의 성장을 암시한 건, 자신 또한 과거 비행이 끝나고 어떠한 깨달음, 내적 성장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카베는 조연이다 보니 직접적으로 제시된 것이 많지 않으므로 그의 깨달음을 알려면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시야를 넓혀 비행 그 이후까지 살펴보자. 학창 시절 바랐던 비행과 우정과 사랑, 이 모든 걸 이뤄낸 그는 성인이 되면 첫사랑과 오순도순 살며 휴가 때 자기가 만든 비행기를 타는 소박한 삶을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북 분단이라는 예상치 못했고 어쩔 도리가 없는 세상의 흐름으로 인해 오카베는 부인과 생이별하게 되고 미군에게 비행기 부품을 납품하는 군수공장 사장이자, 통일을 앞당기려는 테러조직 윌터의 수장이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오카베가 세상을 원망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저 공장의 고양이와 놀아주고 히로키네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한편 부인과 하루빨리 만나기 위해 탑의 폭파 계획을 차근차근 진행할 뿐이다.
다들 어릴 때 인생이 마음대로 안 풀리는 경우, 예를 들어 놀이에서 계속 진다거나 하면 그 현실을 인정하지 못해 자신의 요구를 상대가 들어줄 때까지 우는 친구를 만나본 적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청소년즘 되어서 마찬가지로 놀이에서 계속 진다면 빨리 포기하고 다른 걸 하러 가거나 다음을 기약하며 일단 물러날 것이다. 첫 비행을 성공시킬 때까지의 오카베는 오직 자신의 욕구(비행기)만 생각하면 되는 애송이였으나 비행이 끝난 이후 남북 분단을 맞이하게 된 오카베는 세상의 흐름과 타협하는 법을 배우고 삶을 담담히 살아가는 어른이 되었다. 처음 생각했던 자신의 욕구가 그대로 실현되어야 만족할 수 있다는 집착을 버리고 적당히 흐름에 맡기는 삶의 태도는 성장의 증거다.
오카베를 거침으로써 우리는 ‘히로키는 성장하는가?’에서 ‘히로키는 자신의 욕구가 계획한 그대로 실현되어야 만족할 수 있다는 집착을 버리게 되는가?’로 보다 구체적인 질문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성장, 히로키의 경우
하지만 나를 둘러싼 세계는 그 후 몇 번이고 나를 배신했다.
사유리가 갑자기 사라졌음을 알린 직후 히로키의 대사이다. 사유리가 사라지자 히로키는 비행기도 포기하고 사유리를 찾다가 곧 사유리를 찾는 것도 포기한 채 탑을 피해 도쿄로 도망가 3년을 보낸다. 히로키가 포기하자 혼자 남은 타쿠야도 비행기를 버리고 탑에 대해 연구하는 국가연구소로 취직한다. 분명히 히로키의 행동은 부자연스럽다. 비행기의 완성을 코앞에 둔 채 비행기 제작 멤버도 아닌 짝사랑 상대 사유리가 사라졌다고 의욕이 한 순간에 꺾이는 것도 어색하고, 타쿠야와 오카베의 연락을 굳이 무시한 채 자발적 폐인모드에 돌입한 것도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여기서 히로키를 "약속" , 즉 본인이 욕망하는 미래 계획의 완벽한 실현에 집착하고 있는 애송이로 본다면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히로키와 타쿠야는 중학교 시절을 비행기 만드는 데 바쳤다. 그들은 동네 어디서나 보이는 국경 너머 탑을 바라보며 자신들이 만든 비행기를 타고 그곳으로 날아가는 미래를 매일같이 꿈꾸었다. 그야말로 탑의 시대였다. 그러나 비행기가 순조롭게 완성되어가는 한편으로 그들의 마음속에는 희미한 두려움 또한 피어올랐을 것이다. 눈앞에 선명한 저 탑에 도착하고 나면 이제 무엇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할지, 성취 이후의 허무함과 그 막연함에 대한 두려움 따위 말이다.
히로키와 타쿠야는 각자 탑의 시대 이후 어떤 시대를 살아갈지 나름 준비했던 거 같다. 타쿠야는 고교진학 대신 국가기관의 연구원으로 취직해 탑에 대해 연구한다. 탑의 시대를 살면서 자신의 흥미와 적성을 고려한 진로를 탐색한 것이다. 겉보기로는 알 수 없던 탑의 비밀을 알게된 타쿠야는 탑을 부수겠다고 결심한다. 탑에 도달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탑의 시대 그 이후를 맞이한 타쿠야이기에 한 때 인생의 동기부여였던 탑을 부순다는 결정도 과감하게 내릴 수 있었다. 히로키가 도망가는 바람에 비행기를 3년 동안이나 포기하는 예상치 못한 미래를 맞이했지만 타쿠야는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낸, 터닝 포인트 없이도 성장한 인물이다.
비행기가 거의 완성되어 가던 여름방학 직전 히로키는 사유리에게 자신들의 비행기로 탑에 데려다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히로키는 탑의 시대 이후 사랑의 시대를 살아가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히로키의 제안에 타쿠야는 말리는듯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히로키의 어깨를 붙잡는다. 왜냐하면, 벨라실러의 좌석은 두 개 뿐이기에 사유리를 탑에 데려다 주겠다는 약속은 비행이 시작되기 전 사유리가 한 사람을 선택하거나 두 남자 중 한 명이 사유리를 포기해야만 하는 삼각관계의 파국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의 시대를 살아가고 싶던 히로키에게 사유리의 실종은 탑의 시대 이후의 기반 조건이 사라진, 미래가 무너져버린 상황으로 받아들여졌을 수 있다. 비행기와 사유리가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졌다는 독백에서 암시되었듯 제대로 된 성취도 사랑도 해본 적 없는 중학생의 과장된 두려움으로 바라본다면 히로키의 절망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히로키가 탑을 보지 않기 위해 먼 도쿄로 떠난 이유를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유리가 사라진 이 세상에서는 비행기가 완성되더라도 히로키가 계획했던 사랑의 시대가 기다리지 않는다. 매일 같이 탑이 보이는 아오모리에서는 완성되야하는 비행기가, 히로키를 사랑의 시대가 사라진 텅 빈 미래로 이끌것이기 때문에 탑을 시야에서 지움으로써 히로키 입딴에는 운명에게 사보타주를 행한 것이다.
이렇게 미성숙했던 히로키는 우여곡절 끝에(3년 늦었지만) 사유리를 뒤에 태우고 자신이 만든 비행기를 타고 탑에 도착하여 본인이 상상한 미래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3년이나 버텨서 도착한 ‘계획했던 미래’에 펼쳐진 것은 히로키 자신이 기대한 사랑의 시대가 아니었다. 사유리는 긴 꿈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히로키를 좋아했던 마음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잠에 든 순간의 마음으로 꿈을 꾸기 때문에 꿈 속에서 사유리는 3년 동안 히로키를 좋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단 눈을 뜨자 그 마음은 꿈에서 깨듯 사라졌고 비행기에 타 있는 건 어쨌든 3년 후의 사유리일 뿐이었다. 히로키를 좋아했던 마음은 과거의 사건으로, 추억상자 속 다이어리로 남아버렸다. 결국 히로키가 계획했던 미래는 다시 한번 좌절되고 그는 그토록 두려워하던 비어 있는 미래에 도착해버렸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마음이 사라졌다는 사유리의 고백을 들은 히로키의 반응이다.
괜찮아 깨어났으니까. 이제부터 모든 걸 다시...
히로키는 세상이 또 자기를 배신했다며 도쿄로 도망치지 않는다. 대신 타쿠야가 전달한 테러조직의 미사일을 날려 병기로 작동하기 시작한 탑을 폭파시킨다. 이제 히로키도 사유리도 더 이상 탑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 탑의 시대 그 이후는 이로써 갑작스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미 시작되었다. 욕망이 계획대로 실현되지 않더라도 적당히 타협하면서 묵묵하게 살아가면 된다는 걸 오카베보다도 일찍 히로키 또한 알게 된 것이다. 영화는 깨달음을 얻은 히로키의 대사로 마무리된다.
약속의 장소를 잃어버린 세계에서, 그럼에도 이제부터 우리들은 다시 살아갈 것이다.
그렇다. 약속의 장소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장소를 되찾으려 집착할 필요는 없다. 장소가 없어진 세상에서도 여전히 우리는 살아있고, 살아갈 수 있다.
탑, 약속, 미래, 반환점, 상실
이상으로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의 주인공 히로키가 어떤 성장을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작품은, 탑을 바라보며 살던 히로키가 탑이라는 반환점에 도착해서 새로이 시작될 인생 2막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되는 성장물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여전히 히로키의 두려움과 집착을 공감하기 어렵다면 고3 수험생의 불안한 마음을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쉬울 거 같기도 하다. 어떤 대학에 합격한다고 모든 미래가 계획대로 결정되지도, 인생이 거기서 끝나지도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새로운 시작에 가깝지 않던가? 히로키가 느낀 깨달음은 앞서 많이 강조한 것 같으니, 히로키를 보며 느낀 내 나름의 깨달음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히로키는 계획한 미래에 집착한 결과 구체적 목표가 없는 인생 2막이 너무 무서워서 3년이라는 아까운 시간만 낭비했다. 우리는 그러지 말자.
왜냐하면,
당신이 바라는 그 어떠한 미래 중에 현재를 유보해서라도 달성할 만큼 가치 있는 건 없으니깐.
*대사는 왓챠에서 감상한 영상의 자막을 참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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